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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편에 보이는 건물이 꾸르실료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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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동 언덕 위에 가면
천주교 대구 대교구청이 있습니다.
교구청 길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큰 고목 사이로 성직자 묘지가 보입니다.
2000년도 까지 묘역 옆에 있는
꾸르실료
(크리스찬 봉사자를 위한 단기교육과정)
회관에서 20여 차례 봉사를 하면서
새벽 여명에 보이는 성직자 묘지는
내 마음에 평안을 주고
나의 삶에 죽음의 화두 아래
참으로 철이 드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85년 꾸르실료 수강생으로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 방에 들어 온자 위선과 허식을
집어 던저라“
라는 첫 대면한 글귀에
나 보고 하는 듯 강력한 메시지에
뻣뻣했던 내 모가지가 그대로
꺾여 버리고 그 이후 조금은 낮은
자세로 살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글귀를 제가 써서
작품으로 빨랑까를 했습니다.
(스페인어로 자기 희생과 헌신을 통한
모든 사랑의 표현을 일컫는 말)
지금도 강의실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직자 묘역 양쪽 기둥에는
라틴어로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새겨진 대리석이 반기고 지나서 들어가면
신부님들의 묘역을 만납니다.
내일 아침 깨지 못 하면 죽음인 것을
죽음이 삶이요 삶이 죽음인 것을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가
말 해줍니다.
얼마 전 교구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돌아가신 신부님의 임시로 세운 비목에
오자가 있어 급히 수정을 부탁해서
붓과 먹물을 들고 갔습니다.
수정하기 위해서는 묘지를 올라타야 하기에
누워 계신 젊은 신부님께
“누워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하고는
붓으로 수정 해 드리고 왔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 때부터
신부님들 돌아가시면 비목은 내가 쓰게 되었고
교구청의 담당자는 2미터가 되는 비목과
답례로 미사주로 쓰는 마주앙 한 박스를 들고
나의 방으로 옵니다.
돌아가신 신부님 덕택에 생긴 포도주 한 박스는
지인들에게 선물로 요긴하게 쓰여 집니다.
돌아가신 신부님께 감사 할 따름이지요.
내 비목은 누가 써줄까요?
오래 전 부터 생각 해 온 사후 시신 기증을
마누라와 같이 몇 년 전에 서약 하였기에
그래서 오래 전 마련 해 둔 묘지도 이젠
필요 없게 되었고 자식들에게 벌초 비용도
부담 없이 해주었다 싶어
걱정 하나를 덜었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남은 유골을 팔공산 한티
성지에 뿌려 주었으면 하는 거 정도입니다.
내일은 내 차례일지 모르니
분수에 맞게
그저 오늘 열심히 즐겁고 재미있게
살려 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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